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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멘토] 부산국제영화제로 세계 영화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다
작성자 dacine
날짜 2012.07.10
조회수 2,768

문화공보부를 거쳐 영화진흥공사 사장, 예술의 전당 사장,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 문화부 차관, 그리고 2010년 물러난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에서 현재 몸담고 있는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원장까지. 한국을 넘어 세계 영화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김동호. 그는 인생의 우연한 기회들을 차버리지 않고 소중히 안고 달려왔더니 '영화'가 제 2의 인생이 되어 있더라고 담담히 이야기한다. 자기가 가진 원칙 앞에서 결벽스러울 정도로 꼿꼿하고, 친구 사귀기의 달인이며, 명예를 위해 언제라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선친께서 광산을 하셨어요. 영화 제작보다 더 투기성이 강하고 기복이 심한 업종이었죠. 한때는 잘 나가셨지만 해방 직후에는 어려웠어요. 그러다 6ㆍ25가 터져 부산으로 피난 가서 수용소 생활을 했어요. 그때야 전쟁 통에 다들 어렵게 살았던 때였으니까 뭐, 딱히 특수한 상황이라고 볼 수 없죠.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 청량리 변두리의 초가집 문간방에 네 식구가 살았어요. 그래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기억은 없어요. 그건 저한테 주어진 저만의 환경이었으니까 스스로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었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이 정도 어려움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신념 같은 것이 싹트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어려서부터 한시를 좋아해서 법구경이나 두시언해 같은 것들을 즐겨 읽었는데, 거기엔 빈손으로 태어나 아무것도 없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요. 그래서인가, 많은 물질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현재의 상황 안에서 즐겁게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게 정도(正道)라고 늘 생각해 왔어요.

 

아닙니다. 중고등학교 때는 오히려 천문지리라든가 고전문학 쪽에 제 관심이 쏠려있었어요. 그래서 국문과나 해양학과 쪽으로 갈 생각도 한때 했었죠. 그런데 선친께서 관료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그쪽으로는 못 갔죠.

 

민망하게도 대학 때도 영화를 본 기억이 전혀 없어요. 문화공보부에 들어온 이후에 조금씩 영화를 접하게 되었죠. 가끔 시사실에서 문제가 되는 영화를 틀어줄 때가 있었거든요. (결국 수준 높은 영화만 보신 거네요.) 허허. 그렇게 되나요. 하지만 영화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영화진흥공사로 가면서예요.

 

사실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국가재건최고회의 요원 공고가 먼저 났어요. 그래서 찾아갔는데 졸업예정자는 자격이 안 된다고 해서 시험을 못 봤어요. 만약 시험을 보게 해줬더라면 그쪽에 취업했을 수도 있죠. 그랬더라면 중앙정보부, 지금의 국정원 요원이 되어 그쪽으로 이름이 남겨지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게 악명일지 좋은 이름일지는 모르지만요.

 

제가 수사통으로 이름을 날렸을 수도 있죠. 제가 원래 탐정소설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런 기질을 발휘해서 과학수사를 하는 유능한 수사관이 되었을 수도 있지요. (일동 웃음)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의도대로 모든 일이 이뤄지기 보다는 오히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면서 인생의 행로가 바뀌는 일이 많아요.

 

저의 경우를 보자면, 좀 전에 말한 대로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시험 칠 자격이 안 돼 그 다음으로 모집한 문화공보부에 들어가 행정 일을 하게 되었죠. 그러다 기획관리실장을 한 뒤에는 정권이 바뀌면서 퇴직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는데, 그때 마침 갈 수 있는 자리가 영화진흥공사였죠. 그게 영화 쪽 일을 한 전기가 되었어요. 그 다음에 했던 공연윤리위원회도 일이 생겨 그만 두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6개월 후에 젊은 친구들이 부산국제영화제를 함께하자고 해서 완전히 영화인으로 변신하게 되었죠.

 

이렇듯 우연한 계기로 인생의 행로가 완전히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나중에 뭐가 되어야겠다는 목표도 중요하지만,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변수들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해요. 그 변수가 인생을 아예 바꿔놓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 어떤 상황에서든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자기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방법이지 않을까 싶어요.

 

 

공직 생활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의 재물을 탐하지 않는 것, 즉 돈에 욕심을 내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일반직으로는 가장 높은 기획관리실장을 1980년부터 8년간 했는데, 그 과정에서 큰 건물을 조성하고 기획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죠. 그때 공사 발주 과정에서 뇌물을 받으면 공직생활이 끝난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어요. 아파트에서 지낼 때는 아무도 선물을 올려 보내지 못하게 경비실에 부탁해 미리 차단을 시키기도 했어요.

 

대체로 일을 추진할 때 각계의 광범한 여론 수집으로 첫 단추를 끼웁니다. 1970년에 문화과장으로 발령 받았을 때 시정목표가 문예중흥이었어요. 그때까지 우리나라에 그런 경험이 없었고, 사업의 우선순위를 결정할 노하우가 없었어요. 그래서 문화정책, 문화시설 등 몇 가지 카테고리를 정한 다음, 언론사 문화담당 논설위원을 비롯해 문화예술계의 여론 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에게 우편 설문조사를 했어요. 중요한 사람들은 직접 만나서 면담을 했고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충분히 의견을 나눈 것은 물론이죠. 당시 유능한 사무관들을 우리 과에 배치 받아서 함께 문화예술진흥 5개년 계획을 만들었는데, 무언가 결정하기 전에 항상 심도 깊은 회의를 했고, 대체로 이들의 의견에 따라갔어요.

 

그 다음에는 외국 사례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일을 했어요. 아직도 기억나는 게 프랑스 같은 자유로운 나라에 문화 정책이 있겠는가 싶었는데, 건축물을 조성할 때 건축비의 5%를 미술 장식이나 조각 등에 사용하도록 의무화한 조항 같은 게 있었어요. 그런 식으로 각 나라에서 가져올 만한 정책들을 뽑아냈지요. 문화예술진흥원은 1973년에 발족했고, 독립기념관, 예술의 전당, 현대미술관, 국악당 등은 1980년대 초에 지어졌어요.

 

그 뒤로도 어떤 일이든지 여론을 수집하고 자문을 받아서 방향을 정한 다음에는 '불가능은 없다'는 생각으로 밀어붙였죠.

 

영화진흥공사에 재직 시, 종합촬영소를 지은 것도 영화인들을 밤낮으로 만나며 필요한 게 무엇인지 물어보았고, 1순위가 촬영소라는 대답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문화공보부에서 26년 생활하다가 영화진흥공사에 갔을 때 영화계 일부에서 반대가 있었죠. 낙하산 인사라며 반대성명도 나왔고, 대놓고 사표 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일을 맡은 이상 영화진흥공사를 제대로 키워놔야겠다는 생각이 더 굳어졌어요. 영화계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만나고 영화계 현안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면서 4년을 보냈더니, 예술의 전당 초대 사장으로 자리를 옮길 때는 많은 영화인들이 아쉬워하고 붙들려고 하더군요.

 

그건 철학보다는 오기에 가까운 거죠. 해보지도 않고 안 될 거라는 생각부터 하기 싫은 거고, 어떤 경우가 닥치더라고 이루고 말겠다는 오기도 발동하고요. 젊은 영화인들하고 함께 일하다가 패가망신한다, 문화 불모지인 부산에서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반대가 정말 심했어요. 그래도 하기로 결심하고 1995년 8월에서 12월까지 부산에 뻔질나게 드나들었어요. 그런데 영화과 교수, 기자, 문화예술인, 만나는 사람마다 다 부정적인 거예요. 하지만 그럴수록 제가 부산국제영화제 한다는 게 다 알려진 마당에 오기로라도 성공시켜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습니다.

 

남양주 종합촬영소를 지을 때 주암면 주민 전부를 마을회관에 모시고 사업 브리핑을 하면서 협조를 구했는데, 그때 멧돼지를 두어 마리 잡고 100명과 소주를 주고받았으니 100잔은 마신 셈이었죠. 그러고는 돌아와 샤워하니 술이 깼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월급을 집에 갖다줘 본 적이 없어요. 술집과 식당에 다 갖다 주느라고요. 카드 명세서에 술집 이름만 쫙 나올 정도였죠. 술집이나 밥집에 가면 아무도 돈을 못 내게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원성을 많이 듣기도 했어요. 그래도 남이 내는 걸 제가 결벽하달 정도로 못 참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요.

 

본인이 꼭 내야만 하냐고 묻는데, 남한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거나 신세를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어요. 친한 친구가 방송국 부사장을 하고 있었을 때, 방송국 사람들과 함께 술자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도 절대로 다른 사람이 계산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친구가 돈을 내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럼 네가 계산한 만큼 다시 먹자 해서 술자리가 새롭게 시작된 적도 있습니다.

 

많은 일들을 술자리에서 해결했고, 술이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데 좋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왔어요. 부산국제영화제 할 때는 외국 사람들하고 포장마차에서 밤새며 하도 술을 마시니까, 언론에 부산국제영화제를 술로 성공시켰다느니 세계영화제를 술로 제패했다느니 그런 기사들이 종종 나왔죠.

 

부산국제영화제가 10주년이 된 다음에는 더 이상 술을 안 마셔도 잘 굴러갈 것 같더라고요. 제 나이도 일흔이 되었고 해서 2006년 1월 1일자로 술을 딱 끊었어요.

 

영화진흥공사에 있다가 영화를 심의하는 공윤으로 옮겨오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게 사실이었어요. 하지만 심의 역시 영화를 진흥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입장을 정리하면서, 가능하면 문제가 되는 장면들도 그대로 상영될 수 있도록 결정을 내리곤 했어요.

 

<크라잉게임>의 경우, 당시 규정에서 성기 노출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말씀하신 대로 영화를 구성하는 정말 중요한 장면이었기 때문에 살려야만 했어요.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할 정도로 의미 있는 영화이기도 했고요.

 

그 외에도 <전함 포템킨> 등의 영화는 이미 영화학도에게는 고전이었지만, 공산주의 시절의 영화라는 이유만으로 금지되어 있었어요. 이미 소련연방체제가 무너지고 난 다음이었기 때문에 다시 신청하라고 해서 심의를 통과시켜주었죠. 이런 일들이 누적되다 보니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2년이 안 되어 사표를 쓰게 되었어요.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공윤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부산국제영화제가 탄생할 수 있었지요.

 

어쨌거나 비교적 열린 마음으로 일을 하고, 가능하면 관(官)이 아닌 민간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게 합리적이고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그리고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며 의견을 들으려고 했죠.

 

군사정부 때에도 백낙청 교수나 강신옥 변호사와 같은 민주 인사들과 자주 만났고, 신문사 기자들하고도 친했는데 당시는 워낙 해직 당하는 일이 많았으니까 그들이 상을 당하면 문상도 가고 그랬죠. 그러면 거기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정부 관리가 이런 데 왔다 잘리면 어떡하느냐며 걱정을 했죠. 개인적인 친분으로 간 건데 문책 받는다면 달게 받겠다, 그렇게 생각했죠.

 

 

아마도 1960년대 말쯤이었을 거예요. 선친께서 공무원 생활을 잘 하려면 돈 걱정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셔서, 서울역 근처에 조그만 빌딩을 하나 지으셨어요. 그런데 너무 무리를 해서 지은 데다 부동산 경기가 침체되는 바람에 부채가 몽땅 저한테 넘어오게 되었죠. 해결할 능력이 없다보니 봉급 압류가 들어왔고, 사무실로 빚쟁이들이 찾아왔어요. 공무원으로서 품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사표를 냈죠. 당시 장차관께서 모두 말리셔서 결과적으로는 눌러있게 되었습니다만. 사실 공직 생활을 그만두더라도, 장사를 해서 성공할 자신도 있었어요. 자기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떳떳하고 정당하게 살아나가는 게 명예를 지키는 길이지요.

 

1회에서 3회까지는 당시 규정상 심의를 받아야 했는데, 시비가 붙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도 프로그래머들이 원하면 틀게 했어요. 문제가 생기면 집행위원장인 제가 책임지고 법의 제재를 받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한 밑바탕에는 어떤 영화제든 심의가 있으면 영화제의 급이 떨어져 영화인들도 찾지 않고 좋은 작품도 출품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만약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할 영화가 검열에 걸려 상영을 못 한다던가 한 부분이 잘린다던가 하면 신생 영화제로서는 치명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검열 없이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만약의 경우에 제가 사법 심판을 받게 되더라도 영화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고 각오를 했죠.

 

살아 숨 쉬는 생명력 있는 조직을 만드는 게 리더로서의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직 구성원들의 화합이 중요합니다. 많은 조직이 구성원들의 반목과 갈등 때문에 생명력을 잃어버리지요.

 

두 번째는 조직은 강압적으로 움직인다고 움직여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예요. 조직의 장(長)은 외압을 막아주거나 외연을 넓혀 다른 외부기관과 윤활한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재원을 확보하는 일을 하고, 그 밖의 일들은 모두 조직원들이 자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책임과 권한을 함께 쥐어주는 것이 조직을 발전시키는 데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예로 들자면 영화를 선정하고 프로젝트를 만들고 프로그래밍하는 일은 모두 프로그래머들에게 전임했어요. 저는 해외영화제에 가서 새로운 영화를 많이 접하지만 프로그래머에게 단 한 편의 영화도 추천한 적이 없어요. 제 의견조차 이야기하지 않죠. 프로그래머들이 전적으로 알아서 개ㆍ폐막작을 비롯해 모든 영화를 선정했어요.

 

영화계만큼 서로 반목하는 경우가 많은 데가 없지요. 하지만 서로 싫어하는 사람들이라도 저하고는 다 친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친구라는 건 어찌 보면 진정한 친구는 한 사람도 없다는 이야기와 상통하죠.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친구라면 진정한 친구가 없더라도 좋은 거 아닌가 생각하죠.

 

그래도 저도 인간관계로 곤란한 적이 있어요. 베를린 영화제에 유명한 앙숙이 있었어요. 모리츠 데 하델른 전 위원장과 우르히 그레고르인데요. 그레고르는 부인과 함께 베를린 영화제에 젊은 영화인의 등용문인 인터내셔널 영 포럼을 만든 사람이죠. 하델른이 22년 동안 연임에 연임을 거듭하며 위원장을 했는데, 그 고비 때마다 후임으로 우르히 그레고르가 거론되니까 자연스럽게 경쟁상대가 되었다가 결국은 적대관계가 되어버렸죠.

 

그레고르 부부는 그전부터 영 포럼에 한국 영화를 많이 소개하는 등 한국영화에 관심이 많아 1회 부산국제영화제 때 부인을 심사위원으로 초청하고, 그레고르에겐 공로상을 줬어요. 이후 2~3년 지난 다음에 하델른에게도 공로상을 줬는데, 이걸 가지고 그레고르 부인이 펄쩍 뛴 거죠. 그 사람한테 왜 상을 주냐면서 말이죠. 그 다음부터는 부부가 저를 봐도 아는 척도 안하고. 끊임없이 편지도 보내고 선물도 주고 했지만 풀리지가 않았어요. 결국엔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그레고르와 함께 심사위원을 하면서 제가 서기 역할을 다 하고, 심사 일정을 짜서 나눠주고 그러면서 풀어졌어요. 계산해 보면 3년이 걸린 셈이네요.

 

어딘가 적을 만들어 놓는 것은 저 개인으로서도 문제가 있지만 부산국제영화제에도 하등 이로울 게 없잖아요. 인적 네트워킹을 넓혀 많은 사람들을 초청해야 하는데 한 사람이라도 적이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죠.

 

글쎄요. 딱히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고 다들 친한 분들이죠. 음, 아마 상대방이 저를 라이벌로 생각하는 사람은 있을 거예요. 칸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작년에 제가 퇴임할 때 와서 자기도 퇴임하고 저처럼 되었으면 참 좋겠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사실은 작년에 영화제를 그만 두면서 영화 감독으로의 인생을 시작해보려고 했습니다. 직접 영화를 만들려고 했는데, 다른 일들을 맡게 되면서 더 바빠져 당분간 접었어요. 지난 15년 동안 친하게 지낸 세계적인 감독들, 허우 샤오시엔(후호현)이나 왕자웨이(왕가위), 키타노 다케시 등등의 감독들을 인터뷰해서 영화로 만들고 싶어요. 당신에게 영화란 어떤 의미냐, 사랑이란 어떤 의미냐, 그 사랑이 당신 영화에 어떻게 표출이 되었느냐 그런 걸 물어보는 거죠.

 

저에게 영화는 제 2의 인생의 반려인 동시에, 저에게 영광과 보람을 안겨준 귀중한 자산이죠. 사랑은……, 역시 표현하기 어렵군요.

 

 

 

(인터뷰 이후, 그의 감독 데뷔는 2012년 11월에 열리는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AISFF)의 개막작으로 결정되었다. 영화제 심사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주제로 하는 이 영화에는 배우 안성기, 강수연, 박중훈, 감독 임권택이 출연한다.)

 

'창의적인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노력을 하되 창의성이 있는 노력이라면 더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진솔함'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진솔함은 가장 큰 무기죠. 신뢰를 얻을 수 있고, 그것이 자기 발전의 큰 디딤돌이 되죠.

 

가끔 주례를 서면 젊은 친구들한테 '중용'의 도를 강조해요. '중'이라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게 중심을 잡는 건데, 확고한 주관이 있어야 잡을 수 있어요. 또한 '중'은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것, 즉 과욕, 과탐을 부리지 않는 거죠. '용'은 한결같이 변하지 않고 같은 생각, 같은 실천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믿음을 얻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앞으로 살날이 길지 않다는 이야기이니까, 남은 인생을 제대로 준비해야 하죠. 단계별로 5년이나 10년 단위로 끊어서 보람 있게, 즐겁게 살 수 있는 계획을 잡아야 하고, 거기에 따라 최선을 다해 실천하면 좋을 것 같아요.

 

지난 15년 동안은 만들어진 한국영화를 해외에 알림으로써 한국영화를 진흥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앞으로의 남은 인생은 경쟁력 있는 한국영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하는 게 꿈이에요

 

.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을 설립하고 3년간 전력투구하면 1기 졸업생이 배출될 거니까, 그들이 현장에서 경쟁력 있는 한국 영화를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되겠지요. 그때가 1단계 목표가 실현되는 시기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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