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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세에 데뷔한 초보 영화감독 (주간조선 2012.07.30)
작성자 dacine
날짜 2012.08.28
조회수 2,396

75세에 데뷔한 초보 영화감독

사랑 영화도 찍고 싶고 할 일이 너무 많아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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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남들은 할 일이 없어 심심해 죽는다는 75세에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이가 있다. 초보 감독의 데뷔작은 오는 11월 1일 개막하는 제10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개막작 ‘주리(Jury)’. 영화감독은 야구감독과 함께 남자로 태어나 꼭 한번 해볼 만한 타이틀이라는 얘기가 있다.
   
   영화감독의 꿈을 이룬 행운의 주인공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지낸 김동호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장. 1937년 강원도 홍천 출생이니 올해 일흔다섯이다.
   
   기자는 지난주 우연히 김씨와 두 번 조우했다. 한번은 서울 광화문 교차로 부근 도로원표 앞에서다. 점심시간이 지난 무렵 그는 혼자서 광화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다른 한번은 지난 7월 20일 밤 서울 종로구 동숭동의 건축가 김원 사무실에서였다. 김원은 백남준 탄생 80회를 맞아 백남준의 비디오작품 ‘다다익선’의 제작과정을 담은 책을 펴내며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김동호 원장은 고건 전 총리, 이세중 변호사, 김덕수 사물놀이,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 박재동 만화가 등과 어울리고 있었다. 두 번의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지만 그는 그때마다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행색이 너무 단정해 영화인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다.
   
   지난 7월 24일 늦은 오후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주택가에 있는 한 편집실에서 김 원장을 만났다. 김 원장은 고임표영화편집실에서 막 촬영을 끝낸 영화 ‘주리’를 편집하고 있었다. 편집실에서도 그는 역시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어두컴컴한 대형화면에는 낯익은 배우들의 얼굴이 보였다. 안성기와 강수연이었다.
   
   영화 ‘주리’는 영화제 심사위원들 얘기다. 김 원장 자신이 수없이 맡아보았던 영화제 심사 이야기를 영화로 찍은 것이다. 제작비 2300만원짜리 영화지만 ‘감독 김동호’라는 말에 임권택·손숙이 기꺼이 카메오 출연을 자처했다. 김동호라는 명성에 일본의 도미야마 가츠 이미지포럼 대표, 영국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스가 심사위원 역으로 참여했다. 캐스팅만 놓고 보아도 초호화다.
   
   김씨는 2010년 가을, 15회 부산국제영화제를 끝내고 집행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당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늘 다른 사람 영화만 보고 다녔으니 이제 내 스스로 영화 한두 편 찍어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었다.
   
   

  - 더운 여름날에 넥타이를 매는 이유는 뭔가. “특별한 이유는 없다. 공식행사가 있는 날은 넥타이를 매는 게 예의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TV대담 녹화가 있었다. 정장 차림은 시청자에 대한 예의라고 본다. 사실은 정장을 싫어하지만 공식행사에 초대받았을 때는 (넥타이를 안 맬) 도리가 없다.”
   
   그는 인터뷰에서 사랑 영화를 찍고 싶다고 했다. 노신사 김동호의 청춘 시절 가슴에 각인된 사랑 영화는 무엇일까. 그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학창 시절 영화를 거의 못 봤다. 그때는 영화를 볼 여건이 안되었다. 오히려 문화공보부에 들어간 이후 시사회 때 한국영화를 많이 봤다.”
   
   - 청춘 시절 영화를 못 봤다는 게 의외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강원도 홍천에 살다가 세 살 때 서울로 이사와 계동에서 재동초등학교를 다녔다. 경기중학교를 다닐 때 6·25 남침전쟁이 터져 부산으로 가 피란 생활을 했다.”
   
   - 피란 생활의 경험이 자신을 강하게 만들었다는 얘기를 했던데. “부모님과 누나와 나, 4인 가족이 1·4후퇴 때 세 갈래로 피란을 갔다. 부산에 가서는 피란민수용소에서 지내기도 했다. 어머니와 함께 행상을 하면서 지냈다. 그때 경기고 분교가 구덕산 밑 서대신동에 있었는데 용호동 집에서 무임승차로 학교를 다녔다. 트럭이 지나가면 트럭을 얻어타고, 뭐든지 공짜로 타고 다녔다. 이 시절을 통해 어떤 어려움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시절은 나만 어려웠던 게 아니라 그때는 다 그랬다.”
   
   그는 경기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생이 되었다. 경기고 동기생으론 고건 전 국무총리, 조래벽 라이프그룹 회장이 법대 동기다. 1958년 학보병으로 군에 입대, 4·19혁명 직후 제대했다. 복학해 학교를 다니던 중 5·16군사정변이 발생했다. 정권을 잡은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대졸자를 대상으로 공보부 1기 공채를 한다. 9월 졸업 예정인 그는 공보부 공채 1기로 들어갔다. 이후 공직자 김동호의 인생이 펼쳐졌다. 언론을 담당하는 보도국장, 문화국장 등 문화공보부의 요직을 두루 맡았다. 공직 생활 중 그의 진기록은 기획관리실장 8년이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 기획관리실장을 맡았다. 차관으로 승진이 안 되다 보니 오래했다. 그러면서 다섯 장관과 다섯 차관을 모셨다. 내가 기획관리실장으로 겪은 다섯 명의 장관은 이광표, 이진의, 이원홍, 이웅희, 정한모 다섯 분이었다.”
   
   일반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기획관리실장 재직 중 굵직한 사업을 추진했다. 예술의전당, 독립기념관, 국립현대미술관, 국악당 등 문화시설 건립에 기획 단계부터 깊숙이 관여했다. 동시에 다양한 교유관계를 유지했다.
   
   “그때는 엄격한 시대였는데, 그래도 나는 비교적 폭넓게 사람들과 교유했다. 당시 반체제 변호사로 유명했던 강신옥 변호사도 자주 만났고, 백낙청 교수와도 자주 어울렸다. 기자협회장 하던 김병익과도 친하게 지냈다. 해직기자들이 상을 당했을 때도 나는 빠지지 않고 조문했다.”
   
   - 문화공보부 직원이 되고 나서 본 한국영화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학창 시절 상영되었지만 못 봤던 영화를 그때 다 봤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오발탄’ ‘청춘의 십자로’는 정말 잘 만든 영화다. 비록 기술과 장비 면에서는 떨어졌지만.”
   
   - 좋아했던 배우는 누가 있나. “고은아, 김승호, 정윤희, 제임스 딘, 리즈 테일러 등이었다.”
   
   그는 1988년 기획관리실장을 마치고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사장으로 나갔다. 이게 영화계와 첫 인연이었다. 이후 예술의전당 사장, 문화부 차관을 거쳐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 초대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공직자로서 중요한 일을 많이 했지만 일반 국민이 김동호라는 이름 석 자를 알게 된 것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라는 타이틀 때문이다. 그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제1회부터 15회까지 이끌며 영화제를 아시아 최대영화제로 우뚝 서게 만들었다. 부산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서울 사람이 어떻게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될 수 있었을까. 그의 운명을 바꿔놓은 만남은 1995년 8월 1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역사적 첫 만남이 이뤄졌다.
   

▲ 2009년 10월 8일 부산 해운대 수영만요트경기장에서 열린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PIFF)’ 개막식에서 배우 안성기, 신영균, 문희, 김동호 집행위원장, 배우 이덕화, 박상민(왼쪽부터)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photo 연합

   “이용관 중앙대 연극영화과 교수, 김지석 프로그래머, 전양준 영화평론가가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만났다. 그들은 부산에서 영화제를 열고 싶은데 집행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세 사람은 1992년 6월 이탈리아 페사로영화제에 한국 영화계를 대표해 초대를 받았다. 이들은 페사로영화제에 감명받아 한국에 돌아온 이후 영화제를 만들기로 의기투합했다. 준비 작업을 하면서 어느 정도 틀이 갖춰졌을 때 영화제를 이끌어갈 선장을 검색하다가 내가 걸려든 것 같다.(웃음) 열정이 느껴졌고 나도 영화제에 관심이 많아 맡겠다고 했다.”
   
   - 부산국제영화제를 처음 한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이 어땠나. “처음엔 다들 반대했다. 그게 되겠냐는 반응이었다. 특히 영화 행정을 맡아본 문화공보부 친구들이 결사반대였다. 부산지역 문화예술계나 언론에서도 회의적으로 전망했다. 나는 그럴수록 성공시키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 그렇게 출발했는데 어떻게 15년씩 장기집권이 가능했나. “1~2회 할 때는 부산 사람들의 불평이 있었다. 왜 서울 사람들이 부산에 내려와 영화제를 하느냐는 게 주된 이유였다. 나에게 대놓고 그런 얘기를 했다. 그래서 부산 지역 영화관계자들과 갈등이 많았다. 이용관씨가 한국영화프로그래머를 했는데 그 갈등 때문에 몇 번이나 그만두겠다고 하는 걸 내가 3개월 동안 말렸다. 나도 3회까지만 하고 자리를 넘겨주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런데 3회가 성공하자 그런 여론이 수그러들었다.”
   
   -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한국적 풍토에선 장기집권 자체가 불가능한데. “한국에선 기적이다. 사람은 그만둘 때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10회를 끝내고 그만두려고 했다. 하지만 전용관 건립 문제가 걸려 그럴 수가 없었다. 설계에 3년이 걸렸고, 예산을 따오는 데 3년이 걸렸다.”
   
   그는 집행위원장으로서 예산을 따오는 문제, 중앙정부와 자치단체의 협력 문제, 스폰서를 구하는 문제를 전담했다. 전문적인 문제는 이용관·김지석·전양준 세 사람에게 맡겼다.
   
   - 모든 사람이 회의적으로 봤던 부산국제영화제가 성공한 비결은 뭔가. “첫째가 영화제 전략과 프로그래밍이다. 그 다음이 영화제에 정치적 중립을 지킨 것이다.”
   
   여기서 정치적 중립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1회부터 장관 축사, 국회상임위원장 축사, 시장 환영사 등을 프로그램에서 없앴다. 시장에게는 개막 선언을 하는 역할만이 주어졌다. 2회가 열렸던 1997년은 대통령선거가 있던 해. 김대중 후보는 해운대 본행사장에, 이회창 후보는 남포동 야외무대에 참석했다. 집행위원장 김동호는 양당 대통령 후보 누구에게도 축사나 인사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물론 무대 위에 올라가는 것도 허용치 않았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 요인 중 하나가 정치적 중립 고수라는 사실은 다른 자치단체의 영화제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어떤 자치단체에서는 보궐선거로 직전에 당선된 시장 이름을 무대에서 거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집행위원장을 흔드는 경우도 있었다. 시 입장과 시 의회 입장 때문에 집행위원장과 갈등하고 교체되는 경우도 많았다. 어떤 자치단체에서는 영화제에 재미있는 영화를 틀라고 간섭하기도 한다. 영화제에서는 주로 예술성이 높은 영화를 선택하는데, 재미가 떨어진다고 본 것이다.”
   
   역설적으로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은 ‘타지 사람’이 영화제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만일 초기에 부산 사람이 영화제를 맡았다면 부산지역과 이해관계가 얽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기가 힘들었을 것은 불문가지다.
   
   영화인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영화제 기간 동안 그는 부산을 찾은 영화인들을 일일이 만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곤 했다. 그러다 보면 숙소에 새벽 3~4시에 들어가는 게 예사였다.
   
   “남포동 자갈치시장의 포장마차에 들러 영화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술을 한잔씩 받아 마시면서 포장마차 순례를 했다. 자갈치시장이 다 끝나면 해운대로 와서 똑같은 방법으로 영화인들을 만났다. 알다시피 남포동과 해운대 간의 교통 흐름이 좋지 않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택배 오토바이 뒤에 타고 왔다갔다 한 일도 있다. 그런 전통이 지금은 영화제 기간 동안 ‘스트리트 파티’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그가 집행위원장이라는 권위에 안주하지 않고 현장에서 영화인과 만나 소통했다는 얘기다. 그의 나이를 미뤄 볼 때 새벽까지 술자리를 돌며 영화인들을 만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집행위원장 15년간 장수한 비결과 그 기간 동안 거의 잡음이 흘러나오지 않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가 건축가 김원의 ‘다다익선’ 출판기념 파티에 참석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경력과 연령으로 볼 때 생전의 백남준과 교유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가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 할 때인 1984년 백남준 선생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했다.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 ‘다다익선’을 제작할 때, 대전엑스포 때도 백남준 선생과 만났다. 고등학교도 내가 후배여서 특별히 생각하셨던 것 같다. 집에 백남준 선생이 뉴욕에서 보내온 연하장이 두 개 있고, A4 용지에 숫자를 이용해 나와의 만남을 기록한 종이가 한 장 있다. 우리집 보물이다.(웃음)”
   
   그는 대한민국에서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다. 74세이던 지난해 말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장에 취임했으니 말이다. 이름이 다소 생소한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이론을 안 가르치고 철저하게 실무를 가르친다. 전공 분야는 연출, 프로듀싱, 스크린라이팅 3분야다. 교수진은 심재명, 김미희, 오정환, 윤제균, 곽경택, 이명세 등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는 영화인들이다. 우리 대학원은 3인이 한 팀을 이뤄 2학기 때부터 장편 영화를 하나씩 찍고 학위를 따게 한다. 이번 학기에 대학원생 12명을 뽑았다. 최고령자는 56세로 MBC 편성제작국장 출신이다.”
   
   그는 문화예술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에 속한다. 하루 일정 5~6개는 기본이다. 조찬모임을 참석하고 죽전에 있는 대학원으로 출근해 업무를 본다. 오후에는 보통 서울 시내로 나와 5~6개의 약속을 소화한다.
   
   지난 6월 2일 토요일 그는 워커힐아파트에서 오전 9시에 나와 집에 자정에 들어갔다. 결혼식 참석 3건, 전시회 3회, 결혼 주례 1건을 소화하고 고양시 아름누리극장에서 열린 김매자국제무용제 리셉션에 참석했다. 자동차가 없기 때문에 지하철, 버스, 택시를 이용해 움직인다. 자신과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과는 끝까지 간다는 게 그의 인생관이다. 그는 골프도 거의 안 한다.
   
   “차가 없으니 골프 치려면 남의 신세를 져야 한다. 부담 지우는 게 싫다. 1년에 많으면 다섯 번 정도나 할까. 요즘은 부담이 적은 테니스를 즐긴다.”
   
   그는 현대미술에도 일가견이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15년간 그는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았다. 영화제가 끝나면 그는 습관처럼 으레 그 지역에 있는 현대미술관을 찾아 현대미술의 흐름을 익혔다. 그리곤 반드시 도록을 사온다. 그렇게 수집한 도록이 지금은 아파트 벽면을 가득 채운다.
   
   그는 인생 3막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1961년 문화공보부에 들어가 1993년 문화부 차관을 마친 게 인생 1막이고,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15년을 보낸 게 인생 2막이다. 대학원장이 인생 3막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지금 김동호는 우리에게 그 사실을 보여준다. 일본이 자랑하는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는 80세에 영화 ‘꿈’을 찍었다. “50대 중에도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기자가 말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