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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 사진기자' 자처한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집행위원장(동아일보 2012.12.07)
작성자 dacine
날짜 2012.12.10
조회수 2,506

'영화계 사진기자' 자처한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집행위원장

 


  복잡다단해진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는 뜻하지 않게 세상과 타협하며 자기합리화를 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청렴성이나 강직함은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이다.
 개인적으로 5000여 영화인의 경조사를 일일이 챙기면서도 정작 본인의 경조사는 알리지 않고 심지어 소소한 감사의 뜻으로 전하는 술 한 병에도 손사래 치는 사람. 영화제에 참석하는 대통령에게 여배우가 꽃다발을 건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내치고, 선거를 앞둔 대선 후보들이 영화제에 얼굴을 내미는 일을 막고, 정치인들의 축사를 영상화면으로 대체하는 등 공적인 면에선 더욱 강직해지는 사람. 이런 소신을 실행한 영화계의 작은 거인이 있다. 작다는 것은 영화계만을 지칭한 것이니 결국 영화계의 거인인 셈이다. 전문성 자율성 독자성을 바탕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성공적으로 본궤도에 올려놓은 사람. 현재는 강원문화재단 이사장 겸 단국대 석좌교수인 김동호 씨(74·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에 대한 얘기다.
 

 

 
그가 오래전부터 영화계의 사진기자를 자처하며 사진을 찍어 왔단다. 최근엔 국내외에서 찍은 배우들 사진을 추려서 순회사진전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자신의 인생을 세 단계로 나누셨다죠.
“지나온 날을 돌아보니까 첫 번째는 문화공보부 공무원 시절, 두 번째는 영화진흥공사를 포함해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등 영화인이 됐던 시기, 세 번째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정리해 남들에게 도움을 주고 미처 해보지 못했던 일들을 해보고자 하는 시기입니다. 지금은 세 번째 단계의 첫발을 내디디고 있는 셈입니다.”
 
-세 번째 단계의 구체적인 계획은….
“지금 맡은 일과 더불어 작년에 출간한 책의 후속편 출간, 그동안 관심만 가졌던 현대미술 공부하기, 영화 한 편 제작하기 등입니다. 사진은 이제 영화계에서 한발 물러선 만큼 인물 사진 뿐 아니라 풍경사진도 해보고 싶습니다.”
 
-첫 개인전인가요.
“단체전에 한 번 출품한 적이 있지만 개인전은 처음입니다. 작품은 작년에 부산영화제 기간에 전시했던 사진들입니다. 올해는 인사동 서호갤러리, 강남 올림푸스갤러리 PEN에서 다시 전시를 하게 됐죠. 전시회를 하면서도 괜히 내가 이런 수준의 사진으로 사진전을 하는 것이 부끄럽다, 왜 한다고 했을까, 좀 민망했죠. 하지만 일부러 전시회를 마련해준 분들과의 인연을 무시할 순 없었어요.”
 
-사진은 언제 어디서 배우셨어요.
“언제라고 말하기는 애매합니다. 국내외 여행을 하면 카메라를 갖고 다니며 기념사진 정도는 찍잖아요. 그러다 보니 저절로 카메라에 익숙해졌어요. 사진을 제대로 찍겠다고 덤빈 것은 지난 15년 동안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하면서입니다. 그렇다고 제대로 배운 적은 없고 필요하면 주위에 물어가면서 찍었죠. 어찌 보면 이제 사진을 배우는 단계죠. 그래서 이 인터뷰도 제가 자격이 되나 모르겠어요.”
 
-이제까지 주로 찍은 대상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해외 영화제에 많이 참석했어요. 기록으로 남겨야 할 아까운 장면들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어요. 한국 감독이 무대 인사를 하고 관객과 대화를 할 때, 특히 수상을 하는데 한국기자가 아무도 없는 때가 많았어요. 카메라 들고 있는 저라도 그런 장면들을 찍어서 기록으로 남기고 본인에게도 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게 된 계기입니다. 그때부터 계속 카메라 갖고 다니면서 사진기자들 틈에 섞여 함께 찍고 그러다 보니 영화제 전문 사진기자 비슷하게 되고 말았죠. 순간순간 이 장면이 굉장히 재미있구나 생각되면 바로 찍는 기록용 사진인 셈이죠.”
 
-위원장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무대 앞을 오가면 배우들이 어색해하지 않던가요.
“배우들도 수상을 하면 사실 정신이 없죠. 자신들이 정신없는 상황이라 누가 사진을 찍는지도 몰라요. 해외에서 우리 영화인들이 무대에 올라가거나 파티를 할 때 기자는 초대를 못 받아도 저는 관계자니까 근접이 가능하죠. 그래서 제가 찍은 사진이 유일한 기록일 경우가 많아 다들 좋아합니다. 덕분에 외국 영화제에서 김동호 위원장이 사진을 찍고 있더라, 뭐 그런 기사도 나오고 TV 뉴스에 제가 현장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 잡히기도 했죠.”
 

2008 칸 영화제에 출품된 ‘추격자’의 공식상영이 끝난 뒤 주연배우 김윤석과 나홍진 감독(김윤석의 왼쪽),하정우(뒷모습)가 관객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김동호 촬영


-누가 가장 많이 찍혔나요.
“제일 많이 찍힌 사람은 임권택 감독이에요. 해외에서 가장 자주 만난 사람이니까. 박찬욱 봉준호 최민식 같은 감독이나 배우들은 제가 찍은 사진을 많이 갖고 있을 거예요.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은 이후에는 해외에 나가서 찍은 사진은 3년이 지났건 5년이 지났건 본인에게 꼭 전달합니다. 디지털로 찍어도 e메일로 보내지 않고 꼭 인원수대로 인화를 해서 직원들을 통해서라도 전달했습니다. 외국 영화인들의 경우 사진을 받을 거라고 기대도 안 하다가 2, 3년이 지난 후에 이거 당신 사진이라고 전해주면 놀라면서 굉장히 좋아해요. 내가 촬영한 사진은 반드시 준다는 인식들을 갖게 되면서 포즈도 다양하게 취해주고요.”
 
 

 

영화 평론가들의 재밌는 포즈
 
 
 
-그런 사진 중 인상적이거나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전도연 씨가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 폐막 파티에는 어떤 기자도 초청을 못 받았어요. 그 파티에서 전 씨가 프랑스 배급사 사장에게 장만위(張曼玉)를 좋아한다고 얘기하니까 사장이 직접 소개해주겠다고 말하는 거예요. 내가 바로 쫓아가서 두 여배우가 포옹하는 장면을 찍었는데 상당히 좋아하더라고요. 이장호 감독은 선글라스를 낀 평소 모습을 찍었는데 그걸 나중에 영정사진으로 써야겠다며 좋아하더라고요.”
 

 

2007칸 영화제 폐막파티장의 전도연과 장조위
-사진의 최고 활용 가치를 꼽는다면….
“저한테 제일 중요한 사진의 가치는 기록성이죠. 내가 찍은 사진들을 당시 메모와 함께 노트북에 저장해둡니다. 나중에 사진과 글을 맞춰보면 책 낼 때도 편하고 글에 맞는 사진을 고르기도 쉽죠. 전 세계 70곳의 영화제를 다니면서 느꼈던 일들을 ‘영화, 영화인 그리고 영화제’란 책으로 냈는데 그 책에는 영화제를 38개밖에 수록하지 못했어요. 여기서 빠진 영화제 집행위원장들한테 상당히 미안한 생각이 들어 다음에 증보판을 내거나 새 책을 낼 때 포함시켜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사진을 찍다 보면 재밌는 에피소드도 많겠습니다.
“폴란드에서 트램을 타고 내려오다가 도중에 식당이 있어서 식사를 하고 다시 트램을 탔는데 이게 문제가 됐어요. 역무원이 아까 산 표는 내렸으니 무효고 여기서 다시 표를 끊지 않았으니 40배를 물라고 해요. 이창동 감독과 총영사 등이 역무원과 시비가 붙어 옥신각신했는데 난 그걸 재미있다고 카메라를 들고 싸우는 장면을 찍었죠. 프랑스 도빌영화제에 갔을 때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상영되니까 거기에 개 때려잡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고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앞장서 데모하러 온다는 소문이 들렸죠. 사진을 찍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바르도가 안 나와서 시위 모습만 찍고 말았죠.”
 

 

2007 칸 영화제에 "숨"을 출품한 김기덕 감독이 공식상영 후 관객에게 인사하고있다.
 
 
-사진을 찍을 때 주로 초점을 맞추는 부분이 있나요.
“인간은 표정이 재미있어요. 배우나 감독들의 다양한 표정을 잡는 것이 재미있어요. 희한하게도 각자의 성품이나 성격 등이 사진 속에 담겨 나타나요.”
 
-영화를 하는 사람들은 카메라를 아는 사람들이라 사진도 잘 찍을 것 같습니다.
“세계적인 영화감독 중 사진도 같이 하는 전문가가 여럿 있어요. 작년에 부산영화제에도 왔던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전문가급 사진을 찍어요. 독일 거장 빔 벤더스 감독은 주로 건물 사진을 찍는데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그가 찍은 대작 사진들을 직접 본 적도 있어요. 그런 사진을 보면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선 카메라를 좀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2007칸 영화제 '추격자'를 출품한 박찬욱 감독과 주연 배우 송강호가 공식상영 뒤 청중들의 환호에 답하고있다.
-카메라는 주로 어떤 것을 사용하세요.
“영화제 시상식에서 무대 앞까지 달려나가 카메라맨들 틈에서 사진을 찍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카메라를 디지털로 바꾸면서 줌인 성능이 좋은 올림푸스 카메라를 사용했는데 최근엔 30배까지 줌인이 되는 올림푸스 카메라로 다시 바꿨어요. 앞에 나가지 않아도 어느 정도 앞좌석에 앉아 있으면 무대 인사 정도는 잡을 수 있어 편해요. 무게도 적당해 늘 갖고 다니죠.”
 
-인생 3기에 사진으로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요.
“지금까지 사람들을 찍었다면 풍경이나 건물 사진 같은 것을 찍고 싶어요. 금년에 딴 일을 안 맡았으면 우선 정사진부터 배우려고 했어요. 그러면서 카메라 기술도 많이 익히고 싶었고요.”
 

 

프랑스 도빌의 다리 교각위 카페
 
 
그는 한때 부산영화제 자원봉사자 100여 명과 일일이 폭탄주를 주고받고서도 다음 날 말짱했을 정도로 알아주는 주당이었다. 하지만 세월 앞에 술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 그러던 그가 2006년 1월 1일로 술을 끊고 폭탄주 제조자로만 남았다. 물으나마나한 질문을 해본다.
 
-사진과 술 중 어떤 것이 친교에 도움이 될까요.
“물론 즉각적인 반응은 술입니다. 폭탄주가 훨씬 유리하죠.”
 
-‘타이거클럽’에 대해 얘기해 주시죠.
“2001년에 부산국제영화제 때는 대만의 세계적인 감독인 허우샤오셴 감독, 당시 취임하자마자 삼고초려 끝에 한국을 방문한 칸영화제 집행위원장 등 중요인물이 많이 참석했어요. 그분들과 영화 심사가 끝난 날 밤새도록 술을 마셨죠. 그 자리엔 네덜란드 언론인 페트르, 로테르담영화제 집행위원장 사이먼 필드도 있었어요. 우연히 이듬해 열린 로테르담영화제에서 그 멤버들이 다시 모인 거예요. 거기서도 네 명이 술을 마시다가 내 이름이 범 호(虎)자로 타이거가 있고 로테르담영화제의 상징도 타이거라는 점에 착안해 타이거클럽을 만들자고 했지요. 뒤에 칸 집행위원장이 알고 자기도 부산에서 술을 마셨는데 왜 뺐냐고 항의해 한 명이 늘었어요.
이 팀들이 다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을 때는 새벽 6시까지 놀았고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노래방에서 공항으로 직행해 프랑스로 돌아갔죠. 세월이 지나면서 타이거클럽은 세계 영화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어요. 지금은 술을 끊었지만 폭탄주는 가끔 제조합니다. 요즘엔 화이트 레벨의 소주를 마셔요. 맹물이라는 이야기죠. 하하. ”
 
 
사진을 잘 찍는 사람만이 사진을 잘 아는 사람은 아니다. 사진가가 아닌 이상 사진을 모두 다 잘할 필요는 없다. 기계적인 메커니즘 몇 개 더 아는 것보다 그것을 제대로 활용해 주변에 많은 도움을 주는 사진애호가가 더 필요한 세상일지 모른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그만 두었건만 그의 영화사랑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이제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다면서도 현재 맡고 있는 직책 4개에 각종 영화제 심사위원 활동을 합치면 오히려 시간이 더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세계 영화인들이 그를 부르는 고유명사는 ‘미스터 킴’.  ‘PASSION’이란 그의 사진집 제목처럼 ‘미스터 킴’은 아직도 일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열혈 청년’이다.
“5일 뉴욕 갔다 10일 새벽에 돌아왔다가 오후에 바로 칸영화제로 갑니다.”
이 말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친 뒤, 탤런트 김인문 씨를 조문하기 위해 총총걸음으로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에서 노구의 왜소함보다 거인의 풍모가 느껴졌다.
 
 동아일보 서영수 기자